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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2차대전 승전을 중시하는 이유는>

<러시아가 2차대전 승전을 중시하는 이유는>
2천400만명 희생으로 승리한 '대조국 전쟁' 주장
서방 아닌 소련이 나치독일 무찔렀다는 생각 깊어
승전 기념일도 서방식 5월 8일 아닌 러시아식 9일 고집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기자 = 국제 경제 위기의 여파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러시아가 2차대전 승전 66주년을 맞은 올해에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대규모 승전 기념행사를 열었다.

러시아가 2차 대전 승전을 특별히 중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방에선 제2차 세계대전 하면 미·영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의 전투를 주로 떠올린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처절한 희생 끝에 침략자 나치군을 무찌른 소련군의 승리를 자연스럽게 연상한다. 나치군에 치명적 타격을 입힌 전투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아닌 스탈린그라드 전투라고 여긴다. 여기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한 러시아인들의 시각을 정리했다.

◇ 전쟁 명칭: 제2차 세계대전 vs 대(大) 조국전쟁 = 서방에선 흔히 제2차 세계대전(1939~45년)을 미국·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군과 독일군의 전쟁으로 이해한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것도 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러시아의 생각은 사뭇 다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무엇보다 나치 독일에 맞선 소련의 전쟁이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승전의 주역도 러시아라고 생각한다.

러시아는 1812년 모스크바를 침공했던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조국전쟁’,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대(大) 조국전쟁’이라고 부르며 민족적 자부심의 근거로 삼고 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인뿐 아니라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이긴 전쟁이란 의미다. 유럽 정복에 나선 나폴레옹 군대를 제정러시아 군대와 민중이 힘을 합쳐 무찔렀듯이 세계 지배를 꿈꾸던 히틀러의 강철 군대 역시 소련군과 온 국민이 엄청난 희생을 치러 가며 끝내 굴복시켰다는 민족적 긍지가 깔려 있는 용어다. 러시아가 두 번씩이나 세계를 정복자의 손아귀에서 구해 냈다는 자부심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옛 소련)의 역할은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축소된 면이 적지 않다. 실제로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전쟁 승리에 소련군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심지어 전쟁 과정에서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과 적잖은 갈등을 겪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조차 “소련군이 파시스트 독일의 배를 갈랐다“고 소련의 공을 인정한 바 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장은 독일군과 소련군이 1941년부터 맞붙은 동부전선이었다. 전체 전쟁을 통틀어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도 동부전선이었다. 독일이 패전으로 가는 결정적 타격을 받은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서쪽에 제2전선을 만들어 달라는 소련의 오랜 요청을 뒤늦게 받아들인 연합국이 독일 패망을 1년 정도 앞둔 44년 6월 실시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조차 동부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친 소련군이 나치군 전력의 상당 부분을 붙잡아 둔 것이 주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결정적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 vs 스탈린그라드 전투 =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불을 붙인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은 단기간에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의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고 41년 6월 소련 침공에 나섰다.

스탈린과의 불가침협정을 무시한 기습 공격이었다. 불의의 공격을 당한 소련군은 우세한 독일군의 장비와 전력에 밀려 후퇴를 거듭했다. 불과 5개월 만에 러시아의 서부 지역 대부분이 히틀러의 수중에 떨어졌고, 11월 독일군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근교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련군의 항전도 거세졌다. 위기에 처한 조국을 살리자는 러시아 국민의 전통적인 애국심이 살아나 각지에서 비정규군이 봉기해 게릴라전을 벌였다.

소련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지휘하에 모스크바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치러 냈다. 제2도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900일(41년 9월~44년 1월)간에 걸친 독일군의 포위 공격을 막아 냈다. 여기에 42~43년에 벌어진 두 번의 전투는 나치군에 치명타를 가했다.

소련군은 42년 7월부터 6개월여 동안 계속된 남부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에 대승을 거두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나치군 22개 사단이 후방 부대와 고립된 채 괴멸당했다. 14만7천여 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나치군 6군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를 비롯한 9만1천여 명이 포로가 됐다.

히틀러의 동맹군이던 이탈리아·루마니아·헝가리 군인도 30만 명 이상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이 전투의 승리를 얻기 위해 소련군은 47만 8천여 명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민간인도 4만여 명이 희생됐다.

소련군은 43년 7월 서부 쿠르스크에서 130만 명의 병력과 3천600여 대의 전차를 동원해 80만 병력에 3천여 대의 전차를 갖춘 독일군을 대파했다. 역사가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가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한다.

소련은 서방 연합국의 직접적 병력 투입이 없는 상태에서 자국민의 막대한 희생을 통해 이 같은 승리를 얻어냈다. 그 뒤 소련군은 맹렬한 반격을 펼쳐 나치군을 베를린까지 몰아냈다.

◇종전일: 5월 8일 vs 5월 9일 = 44년부터 독일의 패색이 짙어졌다. 같은 해 6월 미·영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독일군을 막다른 궁지로 몰아갔다.

동유럽 국가들을 차례로 점령한 소련군은 독일에 대한 마지막 공세를 퍼부었다. 베를린 점령을 위한 총공세가 이듬해 4월 중순에 시작됐다. 마침내 4월 30일 독일 국회의사당에 소련의 적기가 꽂혔다.

전날 베를린의 총통 관저 지하에서 연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 히틀러는 이날 에바와 함께 자살했다. 뒤이어 5월 2일 나치군 베를린 수비대가 항복했다.

7일 독일군 작전참모장 알프레드 요들은 독일군을 대표해 프랑스 랭스의 연합군 사령부에서 “5월 8일 오후 11시(중부유럽시간)부터 모든 군사행동을 중단한다”는 내용의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이를 근거로 서방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을 5월 8일로 본다.

하지만 전쟁 말기 서방 연합국이 소련을 고립시키려 한다며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스탈린은 이 항복문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연합군이 아닌 소련군이 제2차 세계대전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나치의 심장부는 베를린이기 때문에 항복문서는 베를린의 소련군 점령사령부에서 서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영국도 스탈린의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8일 오후 10시43분(중부유럽시간) 베를린 근교의 소련군 사령부에서 빌헬름 카이텔 독일군 총사령관이 소련군 총사령관 주코프 앞에서 항복문서에 다시 서명했다.

시차 때문에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9일 0시43분이었다. 이날 소련 최고회의(의회에 해당)는 승전을 공식 선언했다. 스탈린은 승전 기념 특별연설을 했다. 그 뒤 소련과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8일이 아닌 9일을 전승일로 기념해 오고 있다. 반면 영국과 프랑스, 노르웨이 등 서방은 8일을 전승 기념일로 본다.

서로 다른 승전 기념일은 전후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소련과 서방 사이의 냉전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1995년 승전 50주년 행사 때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과 서방 정상들은 5월 8일 영국 런던에서 기념식을 한 뒤 다음 날 모스크바에서 또다시 축하행사를 열었다.

◇ 희생자: 독일 600만명 vs 소련 2천400만명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주로 상대한 것은 소련이라는 주장은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미군과 영국군은 한 번에 독일군 10개 사단 이상을 맞아 싸운 일이 없었다.

반면 소련군은 전쟁 기간 거의 내내 200개 이상의 독일 사단과 직접적으로 대결해야 했다. 독일군은 소련 침공 이후 줄곧 전체 병력의 3분의 2, 때론 4분의 3까지를 동부전선에 투입해 소련군과 맞섰다. 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된 뒤에도 서부전선엔 불과 56만 명의 독일군이 투입된 반면 동부전선에선 450만 명의 독일군이 소련군을 상대했다.

당연히 소련의 희생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모두 6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약 2천400만 명이 러시아인이었다. 일부에선 2천700만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약 880만 명의 군인 전사자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포함한 수치로 당시 러시아 인구의 12%에 해당한다.

우방인 미국과 영국(각각 약 400만~450만 명)은 물론이고 패전국인 독일(약 660만 명)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큰 피해였다. 말 그대로 ‘몸을 던져 싸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전후 인구조사 결과를 비밀에 부쳤다고 한다. 전쟁 전후의 인구 차이를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됐는지를 파악할 수 있고, 엄청난 희생자 수가 알려질 경우 스탈린의 정치적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인명뿐 아니라 물질적 피해도 엄청났다. 전체 국부의 약 3분의 1이 파괴됐다. 1천700개의 도시와 600만 채의 건물, 3만여 개의 공장과 10만여 개의 농장이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다. 소련이 종전 뒤 연합국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근거도 엄청난 인적·물질적 희생 때문이었다.

cjyou@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1/05/09 17:53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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