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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위안소 정벌' 부친 일기 기증한 일본인

위안소 경험 일지 공개
위안소 경험 일지 공개(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17일 서울 연건동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일본인 다나카 노부유키씨가 참전군인으로 위안소를 다녀온 아버지의 일지를 기증하며 기자회견하고 있다. 2010.11.17
zjin@yna.co.kr


"역사를 올바르게 전해야 한다는 마음 담겨…아버지도 피해자"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1938년 2월 21일. 오늘 즐거운 나들이다. 이시카와와 둘이서 먼저 조선 정벌에 간다. 순서는 네 번째였다…옛 연인을 닮은 치오코를 찾아갔다. 울어서 정말 슬퍼 보였다.'

'1938년 3월 13일. 나들이 가는 즐거운 날이다. 먼저 동료와 위안소로 갔다. 일본, 중국, 조선을 정벌하고 돌아간다. 오뎅 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취했다.'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일본 육군 제6사단 소속의 무토 아키이치(1915년생) 분대장의 일지(일기장)다. 그는 일본군 위안소에 가는 일을 '즐거운 나들이'로, 위안부 여성을 범하는 일을 '정벌'로 표현했다.

무토 아키이치 씨는 2007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로부터 3년 뒤, 아들인 시민운동가 다나카 노부유키(59) 씨가 이 일지를 들고 현해탄을 건넜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건립을 추진하는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 기증하기 위해서다.

17일 정대협 사무실에서 만난 다나카 씨는 부친의 일지를 비롯해 부상한 부친이후송됐을 때 전장의 동료로부터 받은 300여 통의 편지와 사진 등을 꺼내 놓았다.

무토 씨가 아들에게 일지를 처음 보여준 것은 1995년. 다나카 씨는 "나한테 보여주면 어떻게 될지 알면서 그렇게 하신 것은 이 일지를 (세상에) 공개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1970년대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유명한 르포라이터가 쓴 '일본군'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자신이 전쟁에 나가 좋은 일을 했다고 말했었는데, 일본이 침략했다고 말하는 그 책을 읽고 나니 '혹시 아버지도 그렇게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일본인, 위안소 경험 일지 기증
일본인, 위안소 경험 일지 기증(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17일 서울 연건동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일본인 다나카 노부유키씨가 참전군인으로 위안소를 다녀온 아버지의 일지를 기증하며 기자회견하고 있다. 2010.11.17
zjin@yna.co.kr

다나카 씨는 그때부터 현재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하는 여동생과 아버지와 함께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는 '왜 침략 전쟁에 가담했느냐'는 말을 들으면 인간으로서 부정 당하는 느낌을 받고 계셨다"며 "왜 그랬냐고 따지기보다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기 전에 어떤 인생을 살고 싶었는지 물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많이 읽었고 파시즘 반대 활동도 하셨습니다. 병사가 되고 나서 헌병한테 감시도 많이 받았다고 했죠. 아버지가 원래 갖고 있던 생각을 알게 되면서 저 역시 반전 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전쟁 책임을 같이 질 것'이라고 선언했고, 그 이야기를 듣고 일지를 보여주신 것 같아요."

그는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군대 경험을 자주 이야기했고, 아들로서 나는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나도 중학교 때까지는 군국주의 소년이었다"며 회상했다.

다나카 씨가 일본의 침략 역사와 한일 관계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것은 1970년대 재일교포인 김우철ㆍ이철 형제 간첩사건이었다. 그는 형제 구원 모임에 참여해 형제가 북에 갔다고 하는 날 구마모토 백화점에서 시계를 샀다는 증거를 한국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재일교포들과 알게 됐고 남북 분단에 일본의 책임이 있으며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1997년 시작된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 문제에 관심을 두고, 중학교 교과서에 위안부에 대한 기술을 삭제하라는 구마모토 현의회의 결정에 맞서 자매도시인 충청남도 시민과 함께 활동하며 결국 삭제하지 않은 교과서를 지켜냈다.

그의 명함에는 '위험한 교과서를 아이들에게 주지 않는 현민 연락계 사무국장', '평화헌법을 살리는 현민 모임 사무국 차장',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독립기념관 역사 연수 투어 시행위원회 대표' 등 네 가지 직함이 적혀 있다.

그는 "아버지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으셨지만,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 이 자료를 후세에 전해야겠다는 메시지를 나한테 보내셨다"며 "역사를 올바르게 전해야 한다는 마음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많은 일본인은 그 시기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 말을 싫어합니다. 아버지도 전쟁을 부정하는 시기가 있었다고 믿었죠. 그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읽으며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셨습니다. 아버지 역시 역사의 피해자인 거죠. 아버지의 젊은 시기에 내가 같이 있었으면 그런 생각을 펼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eoyyie@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0/11/18 10:19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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