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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공산당 가입 10번 퇴짜">

中 군사위 부주석 시진핑(자료사진)
中 군사위 부주석 시진핑(자료사진)

반동분자 자제로 몰려 고초

(서울=연합뉴스) 홍제성 기자 = 중국의 차기 지도자로서 입지를 굳힌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1960년대 후반 문화대혁명 당시 10번 이상 공산당 입당원서를 제출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은 것으로 드러났다.

홍콩 명보(明報)는 20일 최근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선출된 시진핑 부주석이 2003년 직접 쓴 회고문에서 이같은 사실을 공개했다며 회고문 전체를 신문에 게재했다.

이 회고문은 푸젠(福建)성의 대학 교우회 등이 '푸젠 박사의 풍채'란 제목으로 푸젠성 출신 박사 381명을 조명한 총서에 실려 있는 것으로 최근 인터넷을 통해서도 공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시 부주석은 중국의 명문 칭화대(淸華大)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박사학위까지 취득했으며 푸젠성 당서기를 역임하는 등 공직의 상당기간을 푸젠성에서 보냈다.

국무원 부총리와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을 지낸 시중쉰(習仲勛)의 장남인 시 부주석은 혁명 원로들의 자녀그룹인 태자당(太子黨)으로 분류되지만 정작 이로 인해 젊은 시절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심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시 부주석은 회고문에서 "1969년 '지식청년'으로 분류돼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시 량자허(梁家河)촌으로 내려갔을 때를 전후해 10장 이상의 입당 신청서를 썼지만 집안 문제 등으로 인해 허가가 나지 않았다"고 적었다.

부친이 1960년대 초반 반당(反黨) 분자로 몰리면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사상개조를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성실하면서도 믿음직한 청년이었던 그를 눈여겨본 현 위원회 서기의 추천으로 그는 결국 부친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나오기 전인 1973년 입당을 허가받을 수 있었고 곧바로 그는 량자허 대대 지부의 서기로 발탁됐다.

그는 당시 농촌에서 보낸 7년간의 생활을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에는 의지할 사람도 없어 무척 외로웠지만 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내 숙소는 현지의 마을회관처럼 변해갔다.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찾아오면 내가 알고 있는 동서고금의 여러 문제에 대해 상담을 해 드렸고 당지부 서기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추천제도를 통해 대학에 입학하던 1975년, 옌안지구에 배정된 2명의 정원 중 한 자리를 배정받아 명문인 칭화대에도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심한 고초를 겪었음에도 농민과 노동자들과 호흡하면서 실사구시와 인민의 생활을 배웠던 젊은 시절 7년간이 매우 소중한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시 부주석은 "7년간의 경험은 실사구시와 인민대중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자신감을 키울 수 있게 한 소중한 기회였다"면서 "부친이 어렸을 때부터 강조하셨던 단결과 화합에 대해서도 많이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회고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방(下放)의 경험은 실제 현실을 파악하고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자세를 키워줬다"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도 가질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명보는 이 글을 소개하면서 "성실하게 사람을 대하고 현실에 근거해 일을 처리하고 인민을 잊지 않고 공손하고 신중하면서도 적극적으로 공헌하려고 노력했다"는 내용의 격언을 인용, 시 부주석의 과거 삶을 높이 평가했다.

jsa@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0/10/20 18:2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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