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뉴스 검색어 입력 양식

<광복65주년> ⑤독립운동가의 기구한 가족사

송고시간2010-08-12 11:45

이 뉴스 공유하기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본문 글자 크기 조정
영상 기사 <광복65주년> ⑤독립운동가의 기구한 가족사
가족몰살 생존 외동딸 "묘비 세워주세요"
'3代째 가난 대물림' 반세기 넘는 고단한 삶
(서울ㆍ전주=연합뉴스) 백도인 이지헌 기자 = 기구한 삶을 사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적지 않다. doin100@yna.co.kr
pan@yna.co.kr
<촬영, 편집: 정경환VJ(전북취재본부)>

<광복65주년> ⑤독립운동가의 기구한 가족사 가족몰살 생존 외동딸 "묘비 세워주세요" '3代째 가난 대물림' 반세기 넘는 고단한 삶 (서울ㆍ전주=연합뉴스) 백도인 이지헌 기자 = 기구한 삶을 사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적지 않다. doin100@yna.co.kr pan@yna.co.kr <촬영, 편집: 정경환VJ(전북취재본부)>

가족몰살 생존 외동딸 "묘비 세워주세요"
'3代째 가난 대물림' 반세기 넘는 고단한 삶

(서울ㆍ전주=연합뉴스) 백도인 이지헌 기자 = 기구한 삶을 사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적지 않다.

독립운동을 하느라 가정을 돌보지 못해 가세가 기울고 그런 탓에 자녀는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를 얻지 못해 고단한 삶이 두고두고 가족사를 관통해온 것이다.

`독립운동가 집안은 가난을 3대(三代) 대물림한다'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해방 직후 어지러운 상황에서 한국전쟁은 독립운동가 집안과 후손을 궁지로 내몰았다. 좌ㆍ우익의 편 가름에 휩싸이면서 덧없이 희생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고(故) 노병욱 선생과 그 가족은 한국 현대사의 쓰라린 기억을 고스란히 떠안은 집안이다.

노병욱 선생은 전남 나주에서 자신의 나룻배를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실어나르고 독립운동자금을 대다가 일제에 적발돼 광주교도소에서 1년6개월 옥고를 치렀다.

모진 고문에 몸은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끝내 독립군의 행방을 불지 않고 버텼고, 이런 공적이 뒤늦게나마 확인돼 지난 2005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이 가져다준 `훈장'은 그와 가족의 몰살이라는 비극과도 맞닿아 있다.

교도소에서 해방을 맞은 노병욱 선생은 정부가 수립되자 고향에서 대한청년단 부단장으로 활동했다. 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재산이 축났지만 20여 마지기의 논이 있고 배도 남아있어 제법 부자 소리를 듣는 축에 꼈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슬하의 2남 1녀도 총명하게 자라나 주위의 부러움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9월 인민군이 잠시 물러나고 지역을 되찾은 국군의 환영식에 참석한 것이 화근이 됐다.

그는 태극기를 만들어 지역 유지들과 함께 국군을 환영했으나 며칠 뒤 다시 인민군 세상이 됐고 국군과 내통했다는 죄로 한밤중에 끌려가 처참하게 학살됐다.

독립운동가 노병욱 선생의 딸 노장순 할머니
독립운동가 노병욱 선생의 딸 노장순 할머니

(전주=연합뉴스) 백도인 기자 = 독립운동가 노병욱 선생의 딸 노장순 할머니(76)가 11일 전북 전주시 평화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선친의 사진을 들고 기구한 가족사를 설명하고 있다. 2010.8.11
doin100@yna.co.kr

아내와 두 아들도 그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외동딸만 이웃집에 숨어 있다가 목숨을 건졌다.

당시 16살 어린 나이였던 노장순(76) 할머니.

노 할머니에게 남겨진 재산마저 "잘 관리해주겠다"던 친척의 손에 넘어간 뒤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애국지사 집안이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할머니는 그 후 결혼을 해 5남매를 뒀지만 모두 형편이 넉넉지 못해 전주시내 15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

노 할머니에게는 생전에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코 눈을 감을 수 없는 숙제가 하나 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부친과 가족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국가유공자 묘비 하나 세우는 일이다. 노 할머니의 부친은 뒤늦게 독립유공자가 됐지만 국가유공자로는 인정받지 못한 상태다.

정부는 `관련 법에 따르면 공산군에 끌려가 희생당한 것만으로는 (국가유공자) 대상에 포함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법을 떠나 너무나 억울하게 숨진 독립유공자 후손의 간절한 호소"라며 매달리고 있다.

노 할머니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청년단 활동도 하지 않았을 테고 그랬으면 가족까지 처참한 죽임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이런저런 오해를 받을까 봐 60년 세월동안 가족의 죽음을 입에 올리지도 못했는데 정부가 묘비 하나 세워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지만 달랑 50만원의 한 달 지원금으로 서울에서 생활하는 한연식(76.강북구 번동)씨의 사연도 노장순 할머니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독립유공자 고(故) 한준겸 선생의 손자인 한씨는 현재 광복회에서 나오는 월 40만원과 노령연금 월 10만원으로 임대아파트에 산다.

1919년 3.1운동 당시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에서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왜경에게 붙들려 간 조부는 그 뒤로도 독립운동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고 병세가 악화해 해방되기 두 해 전인 1943년 운명했다.

광복 후 빈털터리인 채로 남쪽에 내려와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터전을 잡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전혀 없다 보니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부친은 전기상을 운영했지만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다.

한씨는 "지금 사는 임대주택 관리비를 내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이 거의 없다. 용돈 벌이를 하려고 해도 나이가 팔순이 가깝다 보니 어렵다"고 말했다.

딸 둘은 출가했고 아들과 조카랑 셋이서 살지만 부자가 모두 마땅한 직업이 없는 상태다. 독립운동가 집안은 가난을 대물림한다는 통념을 다시금 일깨운다.

한씨는 "정부에 딱히 바라는 것도 없다. 정부도 한없이 여유가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냥 그러려니 하고 주는 것만큼 받아 생활한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doin100@yna.co.kr

pan@yna.co.kr

댓글쓰기
에디터스 픽Editor's Picks

영상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