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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25> '첫 승전보' 산증인 한태학씨

송고시간2010-06-07 07:00

<나의 6.25> '첫 승전보' 산증인 한태학씨
<나의 6.25> '첫 승전보' 산증인 한태학씨


(청주=연합뉴스) 심규석 기자 = 한태학(79)씨는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 제6사단 7연대 1대대 4중대에 소속돼 경북 포항에서 공비 토벌작전을 벌였는가 하면 6.25전쟁 당시 충북 음성군 동락초등학교를 둘러싸고 첫 승전보를 울린 감우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그는 "아군이나 인민군 모두 희생자가 많았다"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다시는 생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2010.6.7
ks@yna.co.kr

국군 첫승 감우재전투..인민군 2천100여명 궤멸
신녕고지서 왼팔 잃어.."동족상잔 비극 없어야"

(청주=연합뉴스) 심규석 기자 = "젊은 사람들 정신상태가 문제야. 국방을 소홀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젊은 사람들이 안 나서면 우리나라를 누가 지키겠어."

현충일인 6일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현충탑에서 충북도내 각계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 행사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온 한태학(79) 할아버지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천안함 사태'가 터지고 난 뒤 '호국의 달'인 6월에 접어들면 안보의식이 높아지는 분위기여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요즈음 젊은 세대를 볼 때 나라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우리 때만 해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선 학도병들이 구식 총을 들고 싸웠잖아. 그때는 M1, 카빈총 밖에 없었어. 그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희생됐지만 나라는 구했잖아"라고 입을 연 한씨는 "다시는 6.25 전쟁 같은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힘줘 말했다.

◇ 어려운 가정형편에 17살 자원입대 = 한씨가 군에 입대한 것은 17살이었던 1948년 4월 19일이었으니 6.25 전쟁이 발발하기 두 해 전이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대안보3구에서 태어나 쭉 그곳에서 생활하던 한씨는 집에 부담을 주기 싫어 충주농업학교를 중퇴하고 자원 입대했다.

'이등병'으로 입대한 그는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 제6사단 7연대 1대대 4중대에 소속돼 경북 포항에서 공비 토벌작전을 벌였는가 하면 6.25전쟁 당시 충북 음성군 동락초등학교를 둘러싸고 첫 승전보를 울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원래 한씨가 소속된 7연대는 청주에 주둔한 부대였으나 육사 2기생인 강태무와 표무원이 휘하 대대를 이끌고 월북한, 창군 이래 최대 월북사건이 터지면서 춘천으로 이동했다.

<나의 6.25> '첫 승전보' 산증인 한태학씨 국군 첫승 감우재전투..인민군 2천100여명 궤멸 신녕고지서 왼팔 잃어.."동족상잔 비극 없어야" (청주=연합뉴스) 심규석 기자 = "젊은 사람들 정신상태가 문제야. 국방을 소홀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젊은 사람들이 안 나서면 우리나라를 누가 지키겠어." 현충일인 6일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현충탑에서 충북도내 각계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 행사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온 한태학(79) 할아버지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천안함 사태'가 터지고 난 뒤 '호국의 달'인 6월에 접어들면 안보의식이 높아지는 분위기여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요즈음 젊은 세대를 볼 때 나라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우리 때만 해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선 학도병들이 구식 총을 들고 싸웠잖아. 그때는 M1, 카빈총 밖에 없었어. 그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희생됐지만 나라는 구했잖아"라고 입을 연 한씨는 "다시는 6.25 전쟁 같은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힘줘 말했다. ◇ 어려운 가정형편에 17살 자원입대 = 한씨가 군에 입대한 것은 17살이었던 1948년 4월 19일이었으니 6.25 전쟁이 발발하기 두 해 전이다. ◇ 첫 승전보..감우재 전투 = 6.25전쟁 발발 후 한씨가 소속된 7연대는 춘천을 사수하려 했으나 퇴각 명령이 내려지며 춘천 소양강을 건너 홍천 쪽으로 후퇴했다. 80㎜ 박격포와 전차, 장갑차로 무장한 채 무지막지하게 쳐들어온 인민군 앞에서 엠1소총과 카빈총은 무용지물에 가까운, 장난감이었던 셈이다. "호를 파 놓고 고지를 사수하고 있었는데, 머리가 짧으면 적군, 길면 아군이라는 구분밖에 없었다"고 말한 한씨는 "그때 백병전이라는 게 생겼는데 인민군도 그렇고, 아군도 많이 희생됐다"고 안타까워했다. 당시 충주시 신니면 동락리의 동락초등학교 교사인 김재옥(당시 19세.여)씨가 1950년 7월 7일 "2시간 전에 3천여명의 적군이 동락리로 진격해 학교에 주둔했다"는 정보를 7연대에 전달하면서 국군은 첫 승전보를 울렸다. 잠시 신이 나서 무용담을 늘어놓던 한씨는 "아군이나 인민군 모두 희생자가 많았다"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다시는 생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ks@yna.co.kr < 촬영.편집: 이종민 VJ(충북취재본부) >

◇ 첫 승전보..감우재 전투 = 6.25전쟁 발발 후 한씨가 소속된 7연대는 춘천을 사수하려 했으나 퇴각 명령이 내려지며 춘천 소양강을 건너 홍천 쪽으로 후퇴했다.

80㎜ 박격포와 전차, 장갑차로 무장한 채 무지막지하게 쳐들어온 인민군 앞에서 엠1소총과 카빈총은 무용지물에 가까운, 장난감이었던 셈이다.

춘천에서 홍천으로 퇴각하던 도중 낮에는 아군, 밤에는 적군이 고지를 점령했다는 강원도 '모래재 전투'에서 소총에 대검을 끼우고 인민군과 백병전을 치르다 전우가 희생되는 끔찍한 장면을 숱하게 목격하기도 했다.

"호를 파 놓고 고지를 사수하고 있었는데, 머리가 짧으면 적군, 길면 아군이라는 구분밖에 없었다"고 말한 한씨는 "그때 백병전이라는 게 생겼는데 인민군도 그렇고, 아군도 많이 희생됐다"고 안타까워했다.

모래재 고개에서 퇴각해 홍천으로, 다시 원주로, 그리고 충북 제천을 거쳐 후퇴를 거듭하던 7연대 1대대가 주둔한 곳은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와 읍성읍을 잇는 감우재 고개.

당시 충주시 신니면 동락리의 동락초등학교 교사인 김재옥(당시 19세.여)씨가 1950년 7월 7일 "2시간 전에 3천여명의 적군이 동락리로 진격해 학교에 주둔했다"는 정보를 7연대에 전달하면서 국군은 첫 승전보를 울렸다.

"옛날 TV드라마 '전우'를 보면 국군이 인민군 탱크에 올라가 수류탄을 까서 집어넣는 것 많이 봤지? 그것이 그때 나온 거야."

기억을 되짚어 나가던 한씨는 "아군은 무기가 없었어. 연대에 야포가 3-4문 있는 것이 고작이었고 나머지는 M1이랑 카빈총이었는데 무기로 '펑' 때리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육박전이었다"고 회고했다.

한씨가 소속돼 감우재 고개에 주둔했던 7연대 1대대와 동락초등학교 인근 부용산 644고지에 주둔했던 2대대가 인민군을 포위한 채 7월 8일 오후 5시부터 이튿날 오전 10시까지 전투를 벌여 인민군 2천186명을 사살하고 132명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뒀다.

트럭 60대 등 군수품 1천200여점을 노획한 성과 덕분에 대대원 전원이 1계급 특진하는 영광을 안았고 '무공훈장'도 받았다.

야포부대가 적진을 향해 포탄을 퍼부었기는 했으나 치밀한 작전을 통해 M1소총과 수류탄만으로 혁혁한 전과를 세운 것이다.

잠시 신이 나서 무용담을 늘어놓던 한씨는 "아군이나 인민군 모두 희생자가 많았다"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다시는 생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나의 6.25> '첫 승전보' 산증인 한태학씨
<나의 6.25> '첫 승전보' 산증인 한태학씨


(청주=연합뉴스) 심규석 기자 = 한태학(79)씨는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 제6사단 7연대 1대대 4중대에 소속돼 경북 포항에서 공비 토벌작전을 벌였는가 하면 6.25전쟁 당시 충북 음성군 동락초등학교를 둘러싸고 첫 승전보를 울린 감우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그는 "6.25전쟁 때 희생하며 나라를 지킨 선배들을 생각해 가며 국방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ks@yna.co.kr

◇ 떨어져 나간 왼팔 =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는 했으나 동해 쪽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면서 한씨가 소속된 7연대 1대대는 또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우리 7연대는 무지하게 전과를 올렸는데...'쌕쌕이'라고 알아? 날개 양쪽으로 통이 달린 비행기가 있는데 그게 쌕쌕하고 날아다니면서 또다시 후퇴 명령이 떨어지더라고."

승전보를 울리고도 후퇴했던 상황을 침통하게 생각하던 한씨는 통증이 오는지 의수를 단 왼쪽 어깨를 연방 주물렀다.

한씨는 경북 문경을 거쳐 영천으로 후퇴하던 도중 전쟁발발 51일 만인 1950년 8월 15일 영천 신녕고지에서 왼팔을 잃었다.

"8월 15일 오전 11시30분이었지. 주먹밥과 위문품을 갖고 신녕고지에 올라가 나눠주고 태극기도 걸어놓은 뒤 식사를 하려는데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라고. 밖에 있던 지도를 접어 대피하려고 하는데 포탄이 떨어지면서 왼팔이 완전히 끊어져 나갔지."

이렇게 말한 그는 자신의 왼팔을 잃은 아픈 기억은 아랑곳하기 않은 채 "인민군이 야포를 끌고 산으로 올라가 아래를 향해 직사포를 쏘는데, 아군이 많이 희생당했다"면서 "결국, 인원 보충이 안 돼 후퇴할 수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결국 그는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끝낸 뒤 평북 초산까지 진격한 부대를 찾아가 복귀하려 했으나 그를 안타깝게 여긴 대대장의 간곡한 부탁으로 후방으로 내려와 1951년 3월 '이등상사'로 명예제대했다.

◇3대 병역 명문가 = 한씨는 제대 후 결혼해 1남1녀를 뒀다.

아버지가 전쟁통에 크게 다쳐 반세기가 넘게 의수를 달고 생활하는 고통스런 모습을 봐 왔지만 아버지를 닮은 탓인지 장교로 군 생활을 마쳤고 손자 역시 자원입대해 현역으로 생활했다.

지난해에는 한씨와 아들, 손자가 모두 현역군인으로 복무한 점을 인정받아 병무청이 인증하는 '병역 이행 명문가'로 선정됐는가 하면 국군의 날(10.1)에는 육군 37사단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는 경사도 겹쳤다.

6일 오전 10시 현충일 행사 후 귀가한 한씨는 "오늘만 되면 마음이 아프다"면서 "6.25전쟁 같은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즈음 우리 군을 보면 북한군에게 정신적으로 질 것 같다"고 아쉬운 심경을 토로한 그는 "6.25전쟁 때 희생하며 나라를 지킨 선배들을 생각해 가며 국방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k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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