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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25> 9대독자로 자원입대 박학관씨

송고시간2010-04-19 07:30

영상 기사 <나의 6.25> 9대독자로 자원입대 박학관씨
미7사단 포병대대 배속..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치러
"자유수호에 목숨바쳤는데 '북침' '미제침탈'이 웬말"
(울산=연합뉴스) 이상현 기자 = "9대 독자지만 한국전 발발 소식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 했어. 오른쪽 팔에 총알을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또 싸웠어.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려고."
아직도 건강하게 6.25참전 동지회 울산시지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박학관(79.울산시 북구)씨.
미군 7사단 57야포대대 포병으로 참전해 인천상륙작전, 오산전투, 장진호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이름난 전투를 대부분 치른 '6.25의 산 증인'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6.25를 북침이라는 둥 미제의 침탈이라 둥...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안타깝고 피가 거꾸로 쏟구쳐." 6대째 울산시 중구 병영에서 살아온 박씨는 19일 "당시 내 군번은 K1113562"라며 62년 전, 17살 때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공부가 대수냐 나라가 망해가는데"..펜 던지고 학도병으로
박씨는 1950년 6.25전쟁이 났을 때 부산 무선중학교 4학년생으로 청운의 꿈을 안고 학업에 열중하고 이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초순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오면서 학교는 문을 닫았다.
9대 독자로 대를 이어야 한다며 가족들이 거세게 반대했으나 박씨는 '나라가 구하려고' 펜을 던졌다.
같은 달 중순 그는 부산 남구 문현동에 있던 육군 23연대 정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것이다.
당시 23연대는 일본 도쿄(東京)에 주둔해 있던 미 7사단으로부터 '작전에 필요하니 한국 사정을 잘 아는 군인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았다. 박씨의 중대장은 "넌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리니 UN군으로 미 7사단에 배속돼 싸우는 것이 좋겠다"며 박씨를 일본으로 보냈다.
일본에서 2개월간 기초 훈련을 받은 박씨의 한국전 첫 전투는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leeyoo@yna.co.kr
<영상취재 박병준 울산취재본부>
foryoubj@yna.co.kr

<나의 6.25> 9대독자로 자원입대 박학관씨 미7사단 포병대대 배속..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치러 "자유수호에 목숨바쳤는데 '북침' '미제침탈'이 웬말" (울산=연합뉴스) 이상현 기자 = "9대 독자지만 한국전 발발 소식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 했어. 오른쪽 팔에 총알을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또 싸웠어.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려고." 아직도 건강하게 6.25참전 동지회 울산시지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박학관(79.울산시 북구)씨. 미군 7사단 57야포대대 포병으로 참전해 인천상륙작전, 오산전투, 장진호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이름난 전투를 대부분 치른 '6.25의 산 증인'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6.25를 북침이라는 둥 미제의 침탈이라 둥...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안타깝고 피가 거꾸로 쏟구쳐." 6대째 울산시 중구 병영에서 살아온 박씨는 19일 "당시 내 군번은 K1113562"라며 62년 전, 17살 때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공부가 대수냐 나라가 망해가는데"..펜 던지고 학도병으로 박씨는 1950년 6.25전쟁이 났을 때 부산 무선중학교 4학년생으로 청운의 꿈을 안고 학업에 열중하고 이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초순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오면서 학교는 문을 닫았다. 9대 독자로 대를 이어야 한다며 가족들이 거세게 반대했으나 박씨는 '나라가 구하려고' 펜을 던졌다. 같은 달 중순 그는 부산 남구 문현동에 있던 육군 23연대 정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것이다. 당시 23연대는 일본 도쿄(東京)에 주둔해 있던 미 7사단으로부터 '작전에 필요하니 한국 사정을 잘 아는 군인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았다. 박씨의 중대장은 "넌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리니 UN군으로 미 7사단에 배속돼 싸우는 것이 좋겠다"며 박씨를 일본으로 보냈다. 일본에서 2개월간 기초 훈련을 받은 박씨의 한국전 첫 전투는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leeyoo@yna.co.kr <영상취재 박병준 울산취재본부> foryoubj@yna.co.kr

미7사단 포병대대 배속..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치러
"자유수호에 목숨바쳤는데 '북침' '미제침탈'이 웬말"

(울산=연합뉴스) 이상현 기자 = "9대 독자지만 한국전 발발 소식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 했어. 오른쪽 팔에 총알을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또 싸웠어.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려고."

아직도 건강하게 6.25참전 동지회 울산시지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박학관(79.울산시 북구)씨.

미군 7사단 57야포대대 포병으로 참전해 인천상륙작전, 오산전투, 장진호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이름난 전투를 대부분 치른 '6.25의 산 증인'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6.25를 북침이라는 둥 미제의 침탈이라 둥...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안타깝고 피가 거꾸로 쏟구쳐."

6대째 울산시 중구 병영에서 살아온 박씨는 19일 "당시 내 군번은 K1113562"라며 62년 전, 17살 때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공부가 대수냐 나라가 망해가는데"..펜 던지고 학도병으로

인천상륙작전 참전한 박학관씨
인천상륙작전 참전한 박학관씨

(울산=연합뉴스) 이상현 기자 = 6.25전쟁때 미7사단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 장진호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 참전한 6.25참전 동지회 울산시지부 박학관 조직부장이 6.25 당시 전우였던 미군과 찍은 사진.<<지방기사 참조>>
2010.4.19
leeyoo@yna.co.kr

박씨는 1950년 6.25전쟁이 났을 때 부산 무선중학교 4학년생으로 청운의 꿈을 안고 학업에 열중하고 이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초순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오면서 학교는 문을 닫았다.

9대 독자로 대를 이어야 한다며 가족들이 거세게 반대했으나 박씨는 '나라가 구하려고' 펜을 던졌다.

같은 달 중순 그는 부산 남구 문현동에 있던 육군 23연대 정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것이다.

당시 23연대는 일본 도쿄(東京)에 주둔해 있던 미 7사단으로부터 '작전에 필요하니 한국 사정을 잘 아는 군인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았다.

박씨의 중대장은 "넌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리니 UN군으로 미 7사단에 배속돼 싸우는 것이 좋겠다"며 박씨를 일본으로 보냈다.

일본에서 2개월간 기초 훈련을 받은 박씨의 한국전 첫 전투는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서울 수복으로 기세 높여

미 해병대가 상륙하고 이어 박씨의 미 7사단 야포대대가 뒤를 이었다.

북한 인민군의 허리를 끊은 미 7사단은 그대로 내달려 화성, 오산전투에 참전해 대승을 거둔다. 10만 이상의 인민군을 포로로 잡았다.

인천상륙작전 참전한 박학관씨
인천상륙작전 참전한 박학관씨

(울산=연합뉴스) 이상현 기자 = 6.25전쟁때 미7사단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 장진호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 참전한 6.25참전 동지회 울산시지부 박학관 조직부장이 6.25 당시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2010.4.19
leeyoo@yna.co.kr

"수원비행장까지 곧장 밀어붙였어. 허리가 끊겨 허둥지둥하던 인민군을 수도 없이 잡았어. 지금 생각해도 기분 좋은 승리였어."

박씨가 속한 미 7사단은 같은 해 9월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이어 쉼 없이 북진을 계속해 함경남도의 북청, 풍산을 거쳐 그해 11월 초 중국 코 앞인 지금의 양강도 혜산까지 밀고 올라갔다.

박씨는 "북한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 전투 한 번 하지 않고 혜산까지 밀고 올라갔어. 인민군은 그림자도 보기 어려웠지. 이대로 통일이 되고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어"라고 회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부대가 함경남도 개마고원 부근의 장진호로 다시 내려와 숙영하고 있을 때였다. 누워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먼 데서 꽹과리와 북소리가 조그맣게 들리기 시작했다.

◇"총알 맞고 쓰러졌는데 눈밭이 온통 붉은색..이제 죽었구나"

"내가 똑똑하게 보인다고 나를 '와이즈 맨(wise man)'이라고 부르던 미군 동료가 내게 물었어. 저게 무슨 소리냐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아마 전쟁이 끝나 한국군이 사물놀이를 하며 노는 것 같다고..."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착각이었다.

꽹과리와 북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사방에서 호각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가 싶더니 '딱 따다닥 딱딱'하는 총소리가 연이어 귓전을 때렸다. 반사적으로 기관총과 기관포를 잡았다.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의 어두운 숲 속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중공군이었다. 낮에는 숲에 숨고 밤에만 나타났다. 그들은 미 7사단을 장진호에 몰아넣고는 줄잡아 3박4일 동안 괴롭혔다.

인천상륙작전 참전한 박학관씨
인천상륙작전 참전한 박학관씨

(울산=연합뉴스) 이상현 기자 = 6.25전쟁때 미7사단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 장진호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 참전한 6.25참전 동지회 울산시지부 박학관 조직부장이 6.25 당시 장진호에서 찍은 사진.<<지방기사 참조>>
2010.4.19
leeyoo@yna.co.kr

이 전투가 바로 장진호 전투였다.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후일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한 전투다.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몸을 숨기며 도주할 곳이 없었다. 영하 45도의 강추위가 계속되면서 땅이 얼어 참호마저 팔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박씨의 중대원 150여명 가운데 100명가량이 전사했다.

박씨를 포함해 살아남은 나머지 50여명은 안개가 낀 새벽녘에야 겨우 포위망을 뚫었다. 박격포는 모두 버리고 소총만 달랑 든 채였다.

미 7사단 해병사령부가 있는 고토리 비행장까지 30리(12㎞) 길을 뛰어야 했다. 그 사이에도 중국군은 유령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고지만 넘으면 안전지대다. 고토리 비행장이다.'

안도하던 순간, 숲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중공군 1명이 박씨를 향해 소총을 겨누고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박씨가 상대를 보며 총을 겨눴다. 서로 눈이 마주친 찰나 방아쇠를 당겼다.

끝내 박씨의 방아쇠는 당겨지지 않았다. 박씨가 먼저 오른쪽 팔에 총알을 맞고 총신을 놓쳐 버린 것이다. 박씨는 그대로 쓰러졌다.

"학관이 총에 맞았네. 큰일 났다."

얼마나 흘렀을까. 뒤따라 퇴각하던 한국인 전우인 천세영씨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주변의 흰 눈밭은 피로 온통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대검을 꺼낸 천씨가 박씨의 옷을 찢고는 응급조치로 지혈을 했다. 총알에 찢겨 근육이 다 날아간 박씨의 팔은 덩그러니 뼈만 드러났다.

"팔, 다리가 다 떨어져도 산다. 힘내라." 천씨가 박씨를 부축했다. 두 전우는 이렇게 마지막 고지를 함께 넘어 안전지대로 들어섰다.

인천상륙작전 참전한 박학관씨
인천상륙작전 참전한 박학관씨

(울산=연합뉴스) 이상현 기자 = 6.25전쟁때 미7사단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 장진호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 참전한 6.25참전 동지회 울산시지부 박학관 조직부장.<<지방기사 참조>>
2010.4.19
leeyoo@yna.co.kr

흥남에서 철수해 미 8군 제121 야전병원에서 3주간 치료를 받은 박씨는 같은 해 11월 말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나라를 지키고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려면 싸워야 했어. 다시 동부전선에 배치돼 영월 평창 홍성 횡성 원주 춘천 화천 양구를 거쳐 중부전선인 철원 백마고지 연천까지 가지 않은 곳이 없어."

◇"자유 수호에 목숨 바쳤는데 '미제침탈', '북침'이 무슨 소리냐"

박씨는 "미 7사단은 미국을 비롯해 한국, 터키, 에티오피아 등 전 세계 16개국의 다국적 군인으로 이뤄졌다"며 미 7사단이야말로 정말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했다.

"너희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고 싸우고 있다. 참으로 대단하다. 고맙다." 미국과 터키인 전우에게 박씨가 자주 했던 얘기다.

그는 1953년 8월19일 미 7사단에서 국군 26사단으로 옮긴 뒤 1954년 9월 제대했다.

박씨는 6.25를 잊지 말고 제대로 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이들에게 교육 좀 똑바로 했으면 좋겠어. 6.25전쟁이...미국이 부추겼다거나 남한에서 북한으로 쳐들어갔다거나, 이런 말이 학교에서 나오니 안타까워."

박씨는 선배들의 희생이 없었으면 '자유' 대한민국은 없었다는 지적을 잊지 않았다.

"미국과 터키, 에티오피아, 콜롬비아에서 온 군인들이 우리나라의 자유를 지키려고 나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하고 장진호와 백마고지에서 싸웠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 꽃다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박씨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지난달 초 울산 대왕암공원에서 관광을 왔다는 미 7사단 소속의 한 6.25 참전용사를 만났다. 내가 입은 군복의 미 7사단 마크를 보고 반갑게 다가와 말을 걸고는 나를 얼싸안고 소리 내 펑펑 울었다."

그는 "앞으로 두 번 다시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은 없어야 하겠지만, 우리의 후손들은 6.25와 당시 우리를 도왔던 우방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leey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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