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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0년..아! 그곳> 치욕의 패전 '현리전투'


"병사 내팽개치고 지휘부 먼저..패전이라 할 수도 없지"
3군단 중공군에 병력 60% 잃고 부대 해체되는 치욕

(인제=연합뉴스) 임보연 이재현 기자 = "패전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지. 지휘부가 먼저 병사들 내팽개치고 도주했으니 처참한 패주라고 해야지."

현리전투. 중공군 2차 춘계공세 때인 1951년 5월16일~22일 현리지구 전투에 참가했던 육군 3군단 노병과 학도병들은 당시 전투를 '처참한 패주'로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3군단은 강원 인제 현리의 '오미재(옛 오마치)' 고개를 탈환 당한 채 중공군에 쫓겨 아군 방어선에서 70㎞를 후퇴했다.

1950년 10월16일 평양으로 북진 중 창설된 3군단은 이듬해 이 전투로 병력의 60%를 잃은 채 창설 8개월 만에 부대가 해체되는 치욕을 겪는다.

◇아! 오미재

한약재인 오미자가 많이 자생한다는 뜻에서 유래한 '오미재'.

이 고개는 한국전쟁 당시 3군단의 주 보급로이자 퇴로로, 중공군에 의해 차단당해 아군 2개 사단이 패퇴한 치욕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학도병으로 참전한 정병석(75.인제문화원장)씨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당시 3군단이 궤멸하다시피 했던 인제 현리. 60년이 지난 지금 전쟁의 흉터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온했다.

6.25 '현리전투' 생존자 정병석씨
6.25 '현리전투' 생존자 정병석씨
(인제=연합뉴스) 임보연 기자 = 6·25 전쟁 '현리전투'의 생존자인 정병석(75.인제문화원장) 씨가 인제 기린면 '오미재(옛 오마치)' 고개 정상에 조성된 '현리지구전투 전적비'을 바라보며 당시 처절했던 전투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지방기사 참고>> 2010.4.5
limbo@yna.co.kr

당시 전략적 요충지로 수많은 보급품이 헬기로 수송되던 벌판은 민가가 빼곡히 자리 잡았고, 아군이 패주하면서 내동댕이친 군용차량과 야포가 즐비했던 오미재도 아스팔트로 포장된 넓은 도로로 변했다.

다만, 비극의 전주곡이 시작된 오미재 정상에 현리전투의 참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전적비와 충혼탑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이 쓰라린 전투를 거울삼아 나라 지킴을 새롭게 다지고 이 전투에서 이름 없이 몸바친 호국영령의 명복을 빈다'고 쓰인 전적비문은 당시 패전의 참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한다.

마침 오미재 고개에서는 당시 비극을 떠올리듯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유일한 퇴로 '오미재' 고개 '피탈'..3군단 붕괴의 '전주곡'

역사상 최악의 참패로 기록된 치욕의 전투는 1951년 5월16일 오후 4시께 시작됐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한국전쟁전투사(戰史)는 현리전투를 '중공군 2개군에 의해 국군 3군단 예하 3, 9사단이 담당하던 오미재 방어선이 돌파당해 퇴로가 끊겨 3군단 전원이 철수하는 악전고투를 치르면서 70㎞나 후퇴한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5살에 학도병으로 3사단 18연대 3대대 12중대에 배속돼 이 전투에 참전한 정병석씨는 이런 전사 기록은 너무나 '점잖은 표현'이라고 회상했다.

정씨는 "중공군에 일방적으로 쫓겨 도주하면서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힌 국군만 수천 명에 이를 정도로 처참했다"며 "그때는 중공군의 피리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오싹한 공포감을 느꼈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시 오미재는 인제군 기린면과 상남면 31번 국도에 있는 완만한 고갯길로 인제 현리, 홍천, 횡성, 정선을 이어주는 관문이자 3군단 유일의 후방 보급로 및 주요 거점이었다.

그러나 전략적 요충지 오미재에 대한 아군의 방책은 허술했고 공세 하루 만인 5월17일 오전 중공군 1개 중대에 의해 오미재는 탈취됐다. 이는 국군 3군단의 해체를 가져온 전주곡에 불과했다.

◇퇴로 끊긴 3군단..작전명 '무작정 도망쳐라'

오미재를 빼앗긴 3군단은 퇴로를 열고자 예하 3, 9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를 투입해 재탈환에 나섰지만, 오히려 적에게 포위당했다.

퇴로가 끊겼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3군단 병력은 5월17일 오후 날이 어두워지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어 1천436m의 험준한 방태산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6.25 '현리전투' 생존자 정병석씨
6.25 '현리전투' 생존자 정병석씨
(인제=연합뉴스) 임보연 기자 = 6.25 전쟁 당시 '현리전투'의 생존자인 정병석(75.인제문화원장)씨. <<지방기사 참고>> 2010.4.5
limbo@yna.co.kr

정씨는 "당시 지휘부가 연락기로 탈출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아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며 "전황이 급박하다보니 박격포 등 중화기는 방태산 바위 밑에 숨긴 채 몸만 빠져나왔다"고 털어놨다.

그는 또 "간신히 챙겨간 쌀은 흙과 뒤범벅이 돼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솔잎 등을 씹어 먹었을 정도"라며 "5월임에도 오대산은 눈이 무릎까지 덮여 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4~5일 만에 가까스로 강릉 구산의 집결지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당시 3사단 23연대 1대대 4중대 소속 상등병으로 이 전투에 참가한 박한진(83.1979년 대령 예편)씨도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박씨는 "지휘부가 먼저 도주하자 지휘체계를 잃은 병력은 중대.소대 단위에서 10명 규모로 뿔뿔이 흩어졌고 소총을 버린 병사도 부지기수였다"라며 "일부 장교들은 수치스럽게도 계급장도 떼고 달아났다"라고 밝혔다.

이어 "악전고투 속에 낙오된 국군 상당수는 중공군의 추격으로 희생됐거나 포로로 잡혀 북한군으로 전선에 재투입돼 아군에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배고픔과 탈진에 죽어간 전우도 태반이었다"라며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결국, 나흘간 70㎞를 도망친 3군단 병력은 5월19일 오후 중공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나 평창 하진부에서 겨우 수습됐다. 집결 병력은 3사단 34%, 9사단 40%에 불과했다.

◇3군단 '해체'와 작전통제권 '상실'..패전의 교훈

현리전투에서 참패한 3군단은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에 의해 그해 5월 26일 전격 해체됐다.

또 1군단의 지휘권도 미 8군이 직접 통제하는 등 작전통제권이 미군으로 넘겨지는 계기가 됐다.

당시 밴플리트 장군은 유재흥 3군단장에게 "당신의 군단과 예하 2개 사단은 어디 갔소. 모든 화포와 수송수단을 상실했다는 말이오"라고 힐난하듯 물었고 유 군단장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박씨는 "전쟁에서 군 지휘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현리전투의 치욕적인 패전에서 배워야 한다"며 "당시 우리 중대는 독도법과 비상식량 관리 등 중대장의 탁월한 통솔력 덕분에 그 생지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6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전사한 상당수 전우 유해는 여전히 인제 방태산의 험준한 산줄기를 떠돌고 있다"라며 "마지막 한 구의 유해까지 발굴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jlee@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0/04/05 07: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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