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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25> 보병 1연대 파견대장 김창식씨

송고시간2010-04-05 07:01

<나의 6.25> 보병 1연대 파견대장 김창식씨
<나의 6.25> 보병 1연대 파견대장 김창식씨

(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한국전쟁 발발 3년 전인 1947년 11월 19세의 나이로 보병 1연대에 입대한 김창식(당시 19세) 부산 6.25 유공자회 지부장의 6.25 참전 당시 모습. <<지방기사 참조>> 2010.4.5
wink@yna.co.kr

처음 보는 탱크엔 속수무책..전쟁터서 극적 결혼

(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한국전쟁은 나에게 처절한 전쟁의 비극을 일깨워줬지만, 한편으론 백년가약을 맺게 해준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3년 전인 1947년 11월 19세의 나이로 보병 1연대에 입대한 김창식(82. 당시 19세) 부산 6.25 유공자회 지부장은 민족상잔, 6.25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다.

◇소련제 탱크에 아군들 추풍낙엽 신세 = 비가 오던 1950년 6월25일 오전 3시30분께 김씨는 개성에서 보병 1연대 파견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전방에서 총소리를 들었다.

영상 기사 <나의 6.25> 보병 1연대 파견대장 김창식씨
처음보는 탱크 속수무책..전쟁터에서 극적 결혼

<나의 6.25> 보병 1연대 파견대장 김창식씨 처음보는 탱크 속수무책..전쟁터에서 극적 결혼

그는 이 사실을 즉각 상부에 보고했지만 "인민군의 일상적인 훈련일 것"이라는 통보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김씨는 그 총소리가 3년간 15만8천여명이 숨진 한국전쟁의 첫 신호였다는 사실을 그땐 알지 못했다.

3개 대대 중 1개 대대는 휴가를 간 상황에서 김씨를 비롯한 1연대 군인들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2열 종대로 내려오는 인민군에 총 한번 제대로 못 쏴 보고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태어나서 탱크라는 것을 처음 봤다"며 "M1 소총으로 아무리 쏴도 끄떡없었는데 아군은 탱크의 사격에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져 나갔다"라고 말했다.

개성과 지금의 서울 수색 중간쯤에서 일명 고랑포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지만, 전쟁 3일 만에 이미 서울은 함락당한 상태에서 사방에서 인민군들의 포위망이 좁혀오고 있었다.

당시 파주 봉일천 부근에 있던 1사단 사령부마저 인민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당시 백선엽 사단장은 전격 후퇴를 결정했다. 3명 또는 5명으로 조를 짜고서 남쪽으로 후퇴한 김씨는 무작정 남쪽을 향해 걸었다.

◇한강철교 폭파..미군에 희생자 속출도 = 5명으로 이뤄진 김씨 일행이 서울 한강에 도착한 것은 29일 새벽.

이미 한강철교는 28일 오전 2시30분께 미군의 폭격에 부서진 뒤였고 끊어진 다리 위와 강둑 위로 수없이 많은 피난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의 6.25> 보병 1연대 파견대장 김창식씨
<나의 6.25> 보병 1연대 파견대장 김창식씨

(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한국전쟁 발발 3년 전인 1947년 11월 19세의 나이로 보병 1연대에 입대한 김창식(당시 19세) 부산 6.25 유공자회 지부장이 자신이 받은 훈장을 가리키고 있다. <<지방기사 참조>> 2010.4.5
wink@yna.co.kr

그때였다. 미군 제트기의 무자비한 기총소사로 피난민은 물론 아군들도 수없이 쓰러졌다.

"한강을 건너올 사람은 다 건넜다고 판단한 미군이 새벽 한강 주변의 불빛과 강둑에다 무차별 폭격을 가한 것입니다. 이럴 바엔 차라리 물에 빠져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니까요".

김씨 일행은 가지고 있던 총마저 강물에 던지고 한강으로 뛰어들었다. 강물에 몸을 맡기고 200여m 강 건너편으로 갔을 땐 일행 5명 중 김씨를 포함한 3명만이 도착해 있었다.

김씨는 1사단 후퇴 집결지였던 경기도 안양에 도착해 군복과 소총을 지급받고 다시 한강 전투에 투입됐다.

한강을 건너오려는 인민군과 이를 막으려는 국군의 한치 양보할 수 없는 대격돌이 벌어졌다. 김씨는 "양쪽 모두 화력을 총동원해 맞섰고 이 과정에서 한강은 온통 붉은 핏빛이었다"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치열한 동부전선으로 투입 = 국군이 인민군의 공세에 시흥까지 밀리던 찰나 UN군이 부산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UN군은 서부전선을 맡고 1사단은 동부 산악지대 전선을 사수하라는 임무가 주어져 김씨는 1군단 사령부가 있던 강원도 동해로 미군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나의 6.25> 보병 1연대 파견대장 김창식씨
<나의 6.25> 보병 1연대 파견대장 김창식씨

(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한국전쟁 발발 3년 전인 1947년 11월 19세의 나이로 보병 1연대에 입대한 김창식(당시 19세) 부산 6.25 유공자회 지부장이 자신의 옛 사진과 신분증 등이 들어 있는 손때 묻은 앨범을 들춰보고 있다. <<지방기사 참조>> 20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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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5일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국군은 파죽지세로 북으로 치고 올라갔지. 원산, 함흥, 성진, 청진까지 한달음이었어".

김씨는 그렇게 인민군을 북으로 계속 밀고 올라가면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단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같은 달 27일 서울 수복, 10월15일 평양까지 탈환한 국군이었지만 11월25일 30만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 벽에 부딪혀 다시 퇴각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함흥에서 인민군에 포위된 국군과 피난민들은 흥남부두에서 미군의 배에 실려 부산과 거제도로 내려왔다. 김씨는 "부산 국제시장 상권의 시초는 그때 내려온 함경북도 사람들로부터 비롯됐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전열을 다시 가다듬은 김씨는 다시 동부전선으로 올라가 고지를 둘러싼 인민군과의 전쟁에 투입됐다.

◇피난길에서 만난 처녀와 부부 인연 = 동부전선에서 인민군과의 밀고 당기기가 계속될 1951년 9월. 강원도 양양에서 미군의 일명 쓰리쿼터 차량을 타고 울진까지 후퇴하고 있을 때 김씨는 한 피난민의 짐을 실어줬다.

김씨는 키 큰 여학생의 머리에 얹힌 짐이 너무 안쓰러워 차량에 넣고 여학생의 어머니와 동생의 짐도 같이 실은 뒤 '울진에서 내려오면 부대로 찾아오라'라고 말했다.

3일 후 그 여학생은 실제로 부대로 찾아왔고 김씨에게서 짐을 찾은 것은 물론 모포 2장과 쌀 1포대도 받게 됐다.

<나의 6.25> 보병 1연대 파견대장 김창식씨
<나의 6.25> 보병 1연대 파견대장 김창식씨

(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한국전쟁 발발 3년 전인 1947년 11월 19세의 나이로 보병 1연대에 입대한 김창식(당시 19세) 부산 6.25 유공자회 지부장의 결혼식 사진. 김 지부장은 6.25 피난 때 만난 부인(사진 중앙 오른쪽)과 극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지방기사 참조>> 20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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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인연이었을까. 강원도 속초로 부대를 옮겼을 때에도 여학생은 면회를 왔고 급기야 여학생의 아버지가 찾아와 결혼식을 올리자고 제안해 그해 11월26일 양양의 한 교회 예배당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 여학생이 지금의 아내 김미순(76.당시 17세)씨였다.

인근 강릉시내를 온통 뒤져 예식복을 빌린 김씨 부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벌판에서 나무와 가마니로 만든 임시 막사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김씨는 "그때 이후 한동안 아내를 못 봤는데 다음해에 첫째 아들이 태어났다"라고 웃었다.

◇"참전용사 영예수당 월 9만원뿐..예우 아쉽다" = 김씨가 한국전쟁 참전으로 받은 훈장은 금성화랑무공훈장, 은성화랑무공훈장, 화랑무공포장 등 모두 3개.

월남전까지 참전한 김씨는 1977년 중령으로 예편한 이후 현재 부산 6.25 유공자회 지부장을 맡고 있다.

그는 "현재 전국에서 6.25 참전한 생존자 22만명 중 국가유공가로 등록된 사람은 12만4천여명"이라며 "정부에서 한 달 9만원의 영예수당을 주는데 목숨을 내걸고 싸운 대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적은 금액임엔 틀림없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평균 80대, 80% 정도가 무학자인 6.25 참전군인들은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라며 "최소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예우는 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win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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