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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25> 최초 女육군 이인숙 할머니

송고시간2010-03-22 07:30

영상 기사 <나의 6.25> 최초 女육군 이인숙 할머니
여군 모태 '여성의용군 교육대' 1기생
"국가위기 앞에 남녀 구분있냐"며 자원입대

<나의 6.25> 최초 女육군 이인숙 할머니 여군 모태 '여성의용군 교육대' 1기생 "국가위기 앞에 남녀 구분있냐"며 자원입대

여군 모태 '여성의용군 교육대' 1기생
"국가위기 앞에 남녀 구분 있느냐"며 자원입대

※편집자주=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전쟁의 한 복판에서 참상을 온몸으로 겪은 6·25 참전 인물들을 만나 생생한 경험을 들어본다. 동족상잔의 아픔을 되새기면서 어떤 이유로든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일은 없도록 뜻을 모으자는 취지에서다.

(수원=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여자라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요."

한국전쟁은 새내기 초등학교 교사였던 이인숙(78) 할머니의 삶을 180도 바꿔놓았다.

사범대를 졸업하고 1950년 3월 대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이씨. 그는 그때만 해도 성실한 교육자로 일생을 헌신하겠다는 소박한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씨는 자신의 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됐다.

◇선생님에서 군인으로 = 하루에도 몇 번씩 쾅쾅거리는 포성 소리가 나고 대구는 피란 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 와중에도 이씨는 꿋꿋이 학생들을 데리고 수업을 했다. 하지만, 인민군의 기세는 무섭게 올랐고 결국 대구를 떠나 피란길에 올라야 하는 처지가 됐다.

<나의 6.25> 최초 女육군 이인숙 할머니
<나의 6.25> 최초 女육군 이인숙 할머니

(수원=연합뉴스) 신영근 기자 =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새내기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접고 여군의 모태인 '여성의용군 교육대' 1기생으로 자원입대한 이인숙(78) 할머니. 2010.3.22
<< 지방기사 참고 >>
drops@yna.co.kr
http://blog.yonhapnews.co.kr/geenang

피란 준비를 하던 이씨는 '여선생님들은 잠시 모이라'라는 공고를 듣고 달성군청에 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여성의용군'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는 여군이라는 개념이 없던 때. 그래서인지 여성의용군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여자가 무슨 군인이냐"라며 비웃었다. 그러나 이씨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가슴에 뜨거운 것이 북받쳐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여자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담아서 일본군과 싸운 역사도 있잖아요. 여자라고 국가의 위기 앞에서 손만 놓고 있을 수 없지."

부모님은 "스무 살밖에 안 된 네가 무서운 전쟁터에 나가서 뭘 하겠느냐"며 이씨를 극구 만류했지만, 이씨는 결국 군에 지원했다.

여성의용군에는 2천명이 넘게 지원했고 필기시험과 면담을 거쳐 약 500명이 선발돼 1950년 9월 1일 '여성의용군 교육대'가 창설됐다.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군인은 1949년 8월 1일 배출된 여자배속장교 32명이고 1950년 8월 30일 제주도에서 여성 126명이 해병대에 입대하기도 했지만 '여군'의 모태는 이때 만들어진 여성의용군 교육대로 보고 있다.

◇"여군도 남성과 똑같은 훈련" = 이씨는 1950년 9월 6일 입소해 부산 범길초등학교에 마련된 훈련장에서 4주간 남성 못지않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낮에는 M1총, 카빈총, 권총 쏘는 법을 배우고 밤이면 비상소집해 야간 포복훈련을 했어요. 훈련하다 팔꿈치며 무릎이며 다 까졌는데도 여자라고 봐주는 일 없이 얼마나 매섭게 시키던지 눈물을 많이 쏟았지."

그러나 함께 입소한 500명 중 중도포기한 사람은 불과 9명. 491명은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각 사단에 배치됐다.

이씨는 육군본부 연락장교단실에서 행정병으로 사병 인사관리 업무를 맡았다.

군 비행기를 타고 중공군과 인민군 진지 위를 돌며 귀순을 권고하는 일도 여군의 몫이었다.

"매일 밤 11시30분부터 새벽 4시까지 선전활동을 펼쳤는데 비행기를 타고 나가보면 적군들이 노상에 쳐놓은 막사가 보여요. 적이지만 '고향이 얼마나 그립겠어'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여군 창설 초기 우리나라에도 여군이 생긴 것을 세상에 알리려고 육. 해.공군 군악대와 함께 시가행진도 가졌다고 했다.

<나의 6.25> 최초 女육군 이인숙 할머니
<나의 6.25> 최초 女육군 이인숙 할머니

(수원=연합뉴스) 신영근 기자 =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새내기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접고 여군의 모태인 '여성의용군 교육대' 1기생으로 자원입대한 이인숙(78) 할머니. 2010.3.22
<< 지방기사 참고 >>
drops@yna.co.kr
http://blog.yonhapnews.co.kr/geenang

이씨는 "보름에 한 번꼴로 육. 해.공군 군악대가 앞에 서고 뒤에 여군 부대가 뒤따르면서 부산 영도다리부터 부산진까지 행진했다"라고 그때를 추억했다.

◇허허벌판 서울 곳곳에 시신 = 1950년 9월 28일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서울을 한국군과 유엔군이 탈환하고 육군본부와 함께 이씨는 서울로 향했다.

다리가 모두 파손돼 부교(浮橋)로 임시 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넌 이씨는 황폐해진 서울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을지로입구부터 을지로6가까지가 모두 허허벌판이었어요. 을지로5가에는 목욕탕이 있던 자리에 연통 1개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고.. 남조선노동당 본부가 있던 곳(현 상공회의소)은 인민군이 떠나기 전 학살한 양민들의 시신이 그대로 있어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어요."

설상가상으로 서울에서 미처 피란하지 못해 여군 창설을 모르고 있던 사람은 여군들을 보고 "인민군 포로"라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이씨는 "인민군에는 원래 여군이 있었고 우리 여군은 제대로 된 군복도 없이 남자 군복을 입고 있어 더 그런 오해를 샀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후 여군을 예방한 국방부 장관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즉시 미 여군복과 함께 품위유지비도 지급했다고 한다.

◇"전후세대가 6.25 기억해줬으면" = 1953년 7월 남북 양측이 휴전협정을 맺었고 이씨는 1년 뒤 육군 이등상사로 제대했다.

제대 후 이씨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1955년부터 3년간 신문기자로 활동했다. 여군 경험을 살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국방부를 출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군이라는 꼬리표는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고.

"여군이라고 하면 여성스럽지 못하고 드세다는 편견 때문에 취업도 잘 안 돼 오히려 이력서에 여군 경력을 빼버리고 옷도 여성스럽게 입고 다녔어요."

그래도 이씨는 대한민국 군인이라는 자부심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직접 전쟁을 겪으면서 느낀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거든요. 젊은이들이 6·25 전쟁을 잊지 말고 선조의 희생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e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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