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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들의 여행법① 청학동, 조선시대 인기 여행지

송고시간2010-03-11 08:49

선인들의 여행법① 청학동, 조선시대 인기 여행지

여행사도, 호텔도, 항공사도 없던 수백 년 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여행했을까? 휴가제도는 있었는지, 이동수단은 무엇이었는지, 어디서 잠을 자고 밥을 먹었는지, 여행지에서는 무엇을 했는지 등등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유산기(遊山記), 연행기(燕行記), 유람일기(遊覽日記) 등 조선시대 작성된 다양한 기록을 통해 옛 사람들의 여행 모습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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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와 중인계층의 전유물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하는 과정이다. 일상을 내려놓을 수 있는 휴일이 전제돼야 한다. 조선시대에도 휴일은 있었다. 물론, 지금과 같은 방식은 아니다. 일요일이 휴일인 양력 제도는 1895년 을미개혁 때 비로소 도입된다.

조선시대 휴일은 관료의 경우에 설과 추석, 왕과 왕비의 생일 및 기일 등 연중 20일 정도였다. 물론, 부모상을 당하거나 본인 또는 가족이 아픈 경우에는 추가로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휴일 제도로만 보면 조선시대 여행이 가능한 계층은 극히 일부였다. 당시의 도로망과 이동 수단을 감안하면 시간 및 경비에 구애받지 않는, 즉 관직에서 물러난 부유한 사대부가 여행을 향유할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부윤, 목사, 부사, 현감 등 지방관청의 우두머리인 수령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휴가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관아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생활사'(안길정 지음, 사계절출판사)에 따르면 수령은 농번기이자 군정이 바쁜 8~12월에는 와병 중인 부모에 대한 문안이 아닌 이상 근무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지방관도 무시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역관, 의관, 화원, 천문관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중인(中人)은 신분이나 경제력 측면에서 그나마 자유로워 상대적으로 여행 기회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거의 유일한 해외여행 기회로, 매년 수차례 중국 연경(燕京, 베이징)을 다녀오는 사신단에도 많은 중인들이 참여했다. 단원 김홍도는 정조 13년(1789) 동지사(冬至使)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가해 13폭의 '연행도(燕行圖)'를 남겼다.

농업과 상공업에 종사하는 상민(常民)은 생계에 몸이 묶여 있어 사실상 여행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계곡이나 강가에서 즐기는 천렵 정도가 거의 유일한 여가문화였다. 천민 역시 여행을 꿈도 꾸지 못했다. 조선시대 관노비에게는 농번기를 앞둔 음력 2월 1일, 딱 하루의 휴일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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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동은 조선시대에도 인기 여행지

조선시대 여행의 전범은 유산기(遊山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산기란 사대부들이 명산에 오른 체험을 산문으로 남긴 기록으로 현재 약 560편이 전해진다. 유람의 동기, 목적, 동행인, 준비 과정, 여정, 감흥 등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유산기를 살펴보면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여행의 동기에는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영 교수가 조선시대 사대부의 금강산, 청량산, 지리산 유산기 62편을 각각 분석한 논문에 따르면 '아름답고 웅장한 산수를 감상하고자 하는 욕구'가 당시 가장 일반적인 여행 동기였다. 특히 조선에서 가장 빼어나고 기이한 경치를 품었다는 금강산에 대한 사대부들의 희원은 금강산 유산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학문과 심신수련도 사대부들의 주요 여행 동기였다. 사대부들은 여행을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공부의 한 수단이자 호연지기를 기르는 첩경으로 삼았다. 조선 전기 문신인 김종직은 지리산에 오르는 까닭을 "보름밤에 천왕봉에서 달구경하고, 새벽에 해돋이를 맞이하며, 아침에 사방을 두루 조망하기 위해서"라고 적었다. 많은 유산기에 공자의 '등태산소천하(登泰山小天下)'와 논어의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智者樂水)'가 인용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조선 중기 사간원 대간을 역임한 박여량은 "산을 유람하는 것은 글을 읽는 것과 같다"고 피력했다. 웅장하고 경이로운 명산의 경관은 성리학의 이치를 습득할 수 있는 경전과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박여량은 지리산 유람에 앞서 학문을 닦듯이 매일 나막신에 지팡이를 짚고 자택 인근 산골짜기를 왕래하며 체력 증강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사대부들은 또한 문화유산과 선인들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유람을 떠났다. 선인들이 글이나 그림으로 남긴 장소와 역사 유적을 찾아가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체험하고자 했다. 지리산 청학동(靑鶴洞)도 그중 하나였다. 최치원이 은거하다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푸른 학이 서식한다는 이상향 청학동은 오늘날은 물론 조선시대에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여행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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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서 북치고 피리 불고

조선시대 유산기에 나타난 여행 준비물 및 동반자는 지금과 큰 차이를 보인다. 우선, 산에서 밥을 지어 먹어야 했기에 쌀과 부식, 솥과 밥그릇 등을 챙겼다. 또 여분의 짚신과 의복, 침구 등도 챙겼다. 비상식량으로는 쌀가루, 미숫가루, 육포, 말린 꿩고기, 과일이 대표적이었다. 이밖에 하루의 여정과 감흥을 기록할 문방사우와 여정 중에 읽을 서책도 빠지지 않았다.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지고 나르는 일은 노복들이 담당했다. 여행자에 따라 악공을 대동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깊은 산속에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어 호랑이를 쫓았다고 한다. 물론, 모든 사대부가 노복을 대동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 토정 이지함은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전국을 주유했는데, 명문가의 후손임에도 홀로 머리에 갓 대신 솥을 쓰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여행객의 이동 방식은 상민은 도보, 양반은 말이 보편적이었다. 물론, 양반이라 해도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는 경우에는 오직 짚신과 지팡이에만 의지해 걸었다. 몇몇 청량산 유산기에는 돌길이나 미끄러운 길을 갈 때 소를 탔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전기 청백리로 잘 알려진 맹사성처럼 말이다. 덮개 없는 의자형 가마인 남여(籃輿)는 16세기 말 금강산에 처음 등장해 전국으로 확대됐다.

숙박 시설로는 나그네에게 음식을 팔고 잠자리를 제공하던 원(院), 주막(酒幕), 객주(客主)가 있었다. 또 중앙과 지방 사이의 연락 및 물자 운송을 위해 국가에서 설치한 역(驛)도 숙박 시설로 기능했다. 사대부 여행자들은 대부분 친인척이나 지인들의 집을 숙박지로 이용하며 여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 또는 친지가 관원인 경우에는 주로 관아 시설인 객사(客舍)를 이용했다. 주막은 임진왜란 이후 인구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일반화됐다. 19세기에 이르면 주막 없는 고을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교통망은 한양을 출발지로 삼아 의주, 경흥, 평해, 동래, 해남, 강화까지 이어지는 6대 대로(大路)가 간선도로 역할을 했다. 금강산 여행자는 경흥로를, 평양 대동강 여행객은 의주로를 각각 이용했다.

글/장성배 기자(up@yna.co.kr)ㆍ사진/연합뉴스 DB

(대한민국 여행정보의 중심 연합이매진, Yonhap Im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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