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현장 남산 '통감관저' 아시나요(종합)
송고시간2010-02-25 10:10
강제병합 인정 조약에 이완용 도장 찍은 곳
서울시, 소방본부 부근 터에 표지석 추진
(서울=연합뉴스) 이지헌 기자 = 경술국치의 현장이었으나 흔한 알림판 하나 없이 방치됐던 서울 남산의 `통감관저(統監官邸)' 터에 비로소 작은 표지석이 세워진다.
25일 서울시에 따르면 일본 강점기 때 통감관저가 있었던 남산 서울소방방재본부 부근 공터에 `한일병합조약'의 체결장소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울 계획이다.
통감관저는 이토 히로부미 등 한국 침략을 진두지휘했던 일본인 통감이 거처하고 집무를 하던 곳으로, 강제병합 이후에는 1939년 경무대(현재 청와대)로 이전할 때까지 총독관저로 쓰이기도 했다.
식민통치의 정점에 있던 사람의 집무 및 주거공간으로 쓰였다는 점만으로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이지만 통감관저가 기억돼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바로 총리대신 이완용이 1910년 8월22일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을 만나 강제병합을 인정하는 조약에 도장을 찍은 치욕스러운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통감관저는 이처럼 나라의 주권을 타국에 넘긴 부끄러운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곳이지만 최근까지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이 지금까지도 외형을 유지한 채 부끄러운 역사의 교훈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통감관저는 해방 이후 `민족박물관'과 `연합참모본부' 청사로 쓰였지만 옛 중앙정보부 관할 구역으로 이 일대의 출입이 통제된 이후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망각 속으로 잊혀 가던 통감관저의 위치를 다시 찾아낸 이는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 소장이다.
이 소장은 1927년 발행된 `경성시가도'와 사진자료 등을 토대로 현재 남산 서울소방방재본부에서 서울유스호스텔로 이어지는 진입로 주변의 다목적광장이 옛 통감관저 자리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통감관저 앞 4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사진 속 모습 그대로 남아 이 소장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이 은행나무는 현재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어렵게 찾아낸 역사의 현장은 벤치와 농구대만이 지키고 있을뿐 흔히 볼 수 있는 표석 하나 없이 방치돼 왔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 한 시민단체는 지난해 8월 통감관저를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순우 소장은 "현재 있는 건물을 보존하는 것은 괜찮지만 오래전에 사라진 일제 건물을 복구하는 것은 국민정서상 어려워 보인다"며 "다만 장소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하고 어떤 형태로든 표석이라도 만든다면 경술국치 100주년을 짚고 가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현식 서울시 남산르네상스담당관은 "통감관저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표지석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라며 "구체적인 계획은 문화재과와 협의해 마련해 나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이 소장은 "통감관저 부근에는 조선총독부 구청사(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 등 일제 지배기구의 흔적이 많이 있는데 이를 한데 묶는다면 생생한 역사교육 장소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남산 북쪽 기슭인 중구 예장동 일대에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구청사를 비롯해 경성신사(숭의여대), 헌병사령부(남산골 한옥마을), 관저 등 일본 지배층의 시설이 자리잡고 있었다.
pan@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0/02/25 10:1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