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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품 수장가로서의 창랑 장택상>

장택상 국무총리
장택상 국무총리장택상 국무총리가 훈시를 하고있다. 1952.5.7 <저작권자 ⓒ 2001 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난세의 정치인, 천재적 능변가, 정치의 곡예사, 권력의 도화사(道化師), 기고만장의 기염아(氣焰兒), 술수의 화신.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1893-1969)을 일컫는 수식어들이다. 경북 칠곡 인동장씨 가문의 대부호 집안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08년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하고, 1913년에는 영국 에든버러대학 경제학과에 들어갔다.

1938년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한 그는 해방과 더불어 수도경찰청장에 임명되고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초대 외무부장관을 맡았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그해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됐다.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에는 국무총리에 기용됐으며 제5대 민의원까지 내리 당선됐다가 나중에는 재야정치인으로서 반독재 투쟁에 나서기도 한다.

이처럼 다채로운 그의 경력 리스트에는 당대 한국 최고의 고미술품 컬렉터라는 또 다른 수식어가 붙어있다.

"로맨스는 인생이요, 인생은 로맨스"라고 말할 만큼 감성이 풍부했던 데다, 만만치 않은 재력가였던 까닭인지, 전형필과 박영철, 김성수 등과 더불어 창랑은 일본강점기 고미술품을 가장 많이 수장한 조선인으로 꼽힌다.

1937년 3월에 발간된 잡지 조광(朝光)이 수록한 그의 인터뷰 기사에서 창랑은 "선생의 가지신 자기는 몇 점이나 됩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네 한 천여 점 됩니다. 그중에 쓸 만한 것은 삼백여 점밖에 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UN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한 장택상 씨에게 신임장을 수여
UN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한 장택상 씨에게 신임장을 수여이승만 대통령이 UN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한 장택상 씨에게 신임장을 수여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가운데 서있는 이는 장면 씨. 1951.11.5 <저작권자 ⓒ 2001 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같은 기사에서 도자기를 비롯한 고미술품 수집 통로로 창랑은 "모두 역수입품이지요. 조선물건이지만 모다 일본 내지인의 손을 통하여 사게 됩니다. 경성만 하여두 이런 도자기로 생활하는 일본 내지 사람이 오륙백명이나 되고 그 판매가격이 칠팔백만원어치나 됩니다. 전 조선을 치면 아마 일천만원 이상이 될 것입니다"라고 증언했다.

그의 소장 고미술품은 양뿐만 아니라 질 또한 최고로 쳤던 듯, 조선총독부가 1935년 6월에 발행한 '조선고적도보' 제15권에는 그의 도자기 8점이 수록될 정도였다.

나아가 고미술품 감식안 또한 수준이 높아 동아일보 같은 곳에 미술품 품평을 주제로 하는 연재를 하기도 했다.

예컨대 동아일보 1934년 6월17일자 투고문에서는 추사 김정희를 일컬어 "조선은 고사하고 극동 대륙에 유일무이하고 한자가 발생된 이후에 처음 보는 능서가(能書家)"로서 그의 "서법은 조선 산천과 같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실 김상엽 감정위원은 최근 발간된 동양고전학회 학술기관지인 '동양고전연구' 제34집에 이 같은 고미술품 수장가로서의 장택상을 조명하는 글을 투고했다.

창랑이 수장한 고미술품은 어떻게 됐을까?

김 위원은 "6.25 사변으로 상당수 없어졌고 이후 이승만과 맞서기 위한 대통령 입후보 과정에서 주요 유물을 판매하는 바람에 많이 흩어졌다고 한다"면서 "마지막까지 남은 유물은 그의 사후 영남대박물관에 기증됐다"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09/05/05 07:3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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