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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이완용은 `조선의 현금왕'">

<"매국노 이완용은 `조선의 현금왕'">
이기훈교수 "'친일파 귀족' 사치와 낭비로 몰락"

(서울=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안정화를 꾀하려 친일파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며 이른바 '조선귀족 정책'을 폈지만 이들 대부분 사치와 낭비로 몰락하면서 성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민영휘,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 3인방이 한때 엄청난 부를 쌓았고 이완용은 '조선의 현금왕'으로 평가됐다.

이같은 내용은 11일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위원장 김창국)가 출범 2주년을 맞아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목포대 역사문학학부 이기훈 교수의 '일제강점기 조선귀족의 재산보유 규모와 경제활동'이라는 논문을 통해 드러났다.

논문에 따르면 1925년 후작과 백작 등 작위를 가진 조선인 중 당시 5만엔 이상 소득자는 47명에 달했지만 불과 2년 뒤 25명으로 줄어들었다.

이 교수는 이같은 통계를 인용해 일제가 1910∼1920년대 조선 왕족을 관리하던 '이왕직' 직제 예산 180만엔 가운데 12만∼13만엔을 이왕직 종사 조선귀족에게 지원하고 1927년 귀족세습재산령도 만들어 조선귀족의 몰락을 막으려했지만 결국 조선귀족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몰락 배경으로 사치와 낭비를 들며 "남작 조동윤 가문은 1926년 경제적 파산 상황에서도 의복대만 1천300엔, 쇠고기값 1천600엔, 약값 1천100엔 등 생활비로 부채가 1만4천엔에 달할 지경이었다"며 "매년 지출해야 할 원리금이 5천엔에 달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다른 몰락 이유로 일확천금을 노린 투자의 실패를 꼽았다.

후작 이재각의 형이었던 이재현은 1901년 경남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수탈한 재산으로 잡화점을 하고 인플레이션을 전망하며 경성시내 집 수십채와 수천석의 쌀을 빚을 내 사들였지만 경기불황이 닥치면서 파산을 맞은 전형적인 예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급속히 몰락하는 귀족들은 조선총독부의 골칫거리였다.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이들의 체모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이 교수는 논문에서 1920년대까지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인물로 민영휘와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 3인방을 꼽고 민영휘를 '권력형 부정축재'로, 송병준은 '권력을 앞세운 재산강탈형'으로, '이완용은 '조선의 현금왕'으로 평가했다.

이 교수는 "민영휘 일가는 귀족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대자본가로 변신에 성공한 경우였다. 일진회와 시천교의 재산을 사유화했던 송병준은 1920년대 들어 경제ㆍ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재산이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완용에 대해 "국내외 은행에 현금을 예치해두면서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익을 얻는 큰 손 노릇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아들 이항구도 조선에서 현금으로는 제일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전했다.

eddie@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08/07/11 18:26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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