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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초대석> 이승만 초대대통령 아들 이인수 박사

이승만 초대대통령 아들 이인수 박사
이승만 초대대통령 아들 이인수 박사(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건국 60주년을 맞아 흉중을 토로하고 있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아들(양자) 이인수 박사.
dohh@yna.co.kr

"이젠 反이승만시대 끝내고 건국과정 진실 알려야"
"대한민국 건국 반대한 김구, 박정희 때문에 떴다"
'건국 대통령' 재조명 움직임.새정부 출범에 기대

(서울=연합뉴스) 이돈관 편집위원 = 서울의 옛 도성이었던 한양성의 좌청룡(左靑龍)인 낙산 서쪽 기슭, 종로구 이화동 1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이화장'의 노주인은 가슴에 맺힌 얘기가 너무 많은 것 같았다. "내가 할 말이 보통 많은 게 아니다"라고 했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인터뷰가 두 시간을 훌쩍 넘었는데도, 그 정도로는 미진하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안주인인 조혜자(66) 여사가 끓인 떡국으로 점심을 하는 동안에도 얘기는 계속됐다. 어떤 대목에선 얼굴이 붉게 물들면서 목청이 높아졌고, 때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허허하는 웃음을 날리기도 했다.

하기는 왜 안 그렇겠는가. 그가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의 아들(양자) 이인수(李仁秀.77)임에랴. '우남 이승만 박사 사적관'을 지키는 그는 미국 뉴욕대학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정치학자로 명지대 법정대학장을 지냈고, 작년 11월에 발족한 '건국 60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위원이기도 하다.

1982년 12월에 서울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이화장의 '생활관'에서 살고 있는 그를 만난 것은 지난 14일 오전. 이승만의 아들이자 정치학자로서 건국 60주년에 대한 소회가 남다르겠다 싶어서였다. 그를 인터뷰하기로 하고 처음 찾아낸 이화장 전화번호 뒷자리는 '1945'였다.

정문에서 인터뷰 장소인 생활관으로 가는 동안 훑어본 이화장 안쪽의 풍경은 계절 탓인지 조금 썰렁하고 외로워 보였다. 주인의 심사도 얼마만큼은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50년 가까운 기간을 '독재자 이승만'의 아들로 살아 온 그에게서 절망이나 체념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과정 등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고 '반(反)이승만 시대'가 조속히 끝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의도적인 '이승만 깔아뭉개기'의 행태를 되풀이해온 역대 정부에 대한 야속함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정신문명의 쇄신', 즉 반이승만시대를 끝내주기를 기대했다.

"상당히 바쁩니다. 책도 써야 되겠고…. 나이가 들어가니까 그동안 내가 했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했구나 하는 반성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6.25 참전자라서, 6.25세대나 호국단체에서 활동하는 분들입니다."

'건강이 아주 좋아 보인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느냐'는 취지의 질문에, 이인수 박사는 가슴에 쌓인 말만 하기에도 바쁘다는 듯 이렇게 간단히 답변했다. 자신의 일상사나 건강,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말머리는 이내 "우리 나라 지식인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라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의 발언은 처음부터 아주 직설적이고 노골적이었다. 흉중이 분노와 한탄으로 복잡하게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소간의 논리 비약도 없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후, '머지않아 좌파정권이 나타날 텐데 야단났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 DJ 정권, 노무현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김영삼 정부가 중간숙주 역할을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는 건국 60주년의 소회 등 본격적인 질문을 하기도 전에 김영삼 정부에 대한 포문부터 열었다. '김영삼 씨가 들으면 섭섭할 말'도 거침없이 했다. 많은 정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잘못 뽑았다고 생각해, 이름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10년 동안 지속된 '좌파정권' 시대가 끝나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게 됐으니 "밝을 명(明), 넓을 박(博)이라는 그의 이름처럼 세상이 좀 바로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바로 되는 세상'이란 무엇일까?

이승만 초대대통령 아들 이인수 박사
이승만 초대대통령 아들 이인수 박사(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건국 60주년을 맞아 흉중을 토로하고 있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아들(양자) 이인수 박사.
dohh@yna.co.kr

"무엇보다 먼저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 진실이 밝혀지는 시대"다. 그동안 "권력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가려져" 이승만을 비롯한 건국시기의 주요 인물 등에 대한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진실의 시대'가 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건국과정과 건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반이승만시대의 종언'과 '진실의 시대 도래'를 동일선상에 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박사(이승만) 하야 후에 출범한 장면 정부, 그 것을 뒤엎은 박정희 정부를 비롯한 군사정부, YS. DJ.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역대 정부가 '반이승만시대'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빨리 '반이승만시대'를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끝내야 진실이 알려집니다."

이인수 박사에 따르면, 1945년 8월15일은 '광복의 날'이 아니라 일본이 패망한 날이다. 실제로 나라를 되찾은 것은 바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이다. 그러나 3년에 걸친 이승만 중심의 '건국투쟁사'는 지금 지워져버리고 없다. 왜 그렇게 됐을까?

"박정희 씨가 권력을 잡으면서 헌법 전문에서 이 박사의 이름을 깎아버리고 거기에 4.19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4.19 때 희생된 학생들에게 건국훈장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건국은 없어지고 4.19부터 역사가 시작되는 것처럼 돼버렸습니다. 건국사의 말살은 민족적 죄악입니다."

박정희는 하와이에 망명 중이던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한 때는 그의 유해를 국립묘지(당시 국군묘지)에 모시게 해달라는 유족의 청원을 거부하기도 했다. "수없이 자기 부인(육영수)의 묘에 들르면서도 가는 길 옆에 있는 이 박사의 묘소는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이런 얘기는 박정희 정부 때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이 나중 이인수 박사 본인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최고액권인 10만원짜리 지폐의 초상인물로 선정된 김구에 대한 이인수 박사의 시각도 남다르다. 시니컬하기까지 하다. 박정희 정부가 1969년 서울 남산에 '백범광장'을 만들고 동상을 세우는 등 김구를 띄웠고, 그 이후 정권들도 덩달아 그를 최고의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로 부각시켜 '건국의 아버지'로까지 추앙해 왔으나 그의 진면목은 '해방정국에서 미아가 된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김구씨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를 거부한 것은 다가올 북한의 남침에 대한 패배주의 때문"이었다면서 그 '증거'를 제시했다. 1948년 7월11일, 당시 중국 장제스(蔣介石) 정부의 주한공사였던 류위완(劉馭萬)의 김구 면담자료(영문 초록), 그리고 1948년 4월30일 발표된 56개 사회단체의 '남북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 등이다. 외국군 철수 후 그들만으로 정부를 세우겠다는 이들 단체중 김구의 한독당,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을 제외한 54개 단체는 모두가 '공산.좌파정당이었다.

"이 박사에게 동생으로 사랑을 받았던 백범은 당초 '나는 우남(이승만)의 노선을 따른다', 심지어는 '남산의 소나무가 말라 죽어도 우남에 대한 신의는 절대로 사라질 수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노선이 바뀌어버렸어요."

1947년 12월1일, 김구는 자신과 이승만의 정치노선은 같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으나 "그 다음날 일어난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미군정의 증인으로 서게 되자 '홱 돌았고' 김일성의 미끼에 걸려든 측면도 있다"는 게 이인수 박사의 주장이다. 장제스가 류위완을 김구에게 보내 "당신이 공산당이라면, 중화민국 정부가 협조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박정희가 남산에 백범광장을 만들어 동상을 세우는 등 백범을 띄운 목적은 이 박사를 격하하기 위한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둬야 할 것은 이 박사가 결코 단독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김구씨가 '통일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했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이 1946년 2월에 평양에 사실상의 단독 '인민정권'(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을 수립한데 이어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적인 정부 수립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일단 남한에서라도 우리 민족을 대변하는 기관을 만들자 했고, 이것이 자유민주정부 수립 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이인수 박사의 자료에 따르면, 김구는 1947년 12월22일 '우리는 여하한 경우에든지 (남한의)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로부터 약 4개월 후인 1948년 4월19일에는 38선을 넘어 평양행을 감행하고 20일부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한다. 이 회가 끝난 후 26일 발표된 '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에는 "남조선 단독선거를 파탄시켜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김구와 김규식은 4월30일 김일성.김두봉과의 4자회담에 이어 남북지도자급 인사 15명의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회담에도 참석한다. 회담 공동성명에는 외국 군대 철수 후 56개 사회단체 공동명의로 "전조선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층 각계를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라고 돼 있다.

그는 이에 대해, "(김구가) 사실은 북한에 가서 김일성에 가담하여 우파 민족진영을 배제한 4.30 정부수립안에 합의 서명했다"면서 "이는 민족진영에 대한 엄청난 배신이었다"고 단언했다. 그의 음성은 더욱 높아졌고, 속도도 빨라졌다.

"이승만 박사는 귀국후 북에 공산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38선의 개방을 주장했습니다. 또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위한 외교를 추진하면서 한국 신탁통치 문제를 협의하기로 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폐기하라고 했습니다. 국제정치를 훤하게 내다보는, 당당한 건국투쟁이었습니다. 그 분은 단 한 번도 자기의 정치노선을 '단독정부' 수립이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모두 반대파들이 붙인 이름이지요. 결국에는 미국도 이 박사의 주장대로 따라오지 않았습니까? 유엔의 결의에 의한 남북 총선거를 반대한 것은 김일성이었습니다. 김구 씨가 평화적 통일을 바란다면 왜 김일성편을 듭니까?"

그는 김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인터뷰 기사만으로는 모두 담아낼 수 없는 많은 얘기를 했다.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건국과정에 관한 진실, 김구에 관한 진실,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에 관한 진실 등이 알려져야 한다고 했다. '역사의 진실'에 입을 다물고 있는 언론과 학자들을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백범을 부정하라, 안창호를 부정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승만 박사든, 백범이든, 안창호든 간에 그 사람들이 뭘 잘했고, 뭘 잘못했는지를 진실하게 알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진실을 은폐해선 안됩니다."

한 월간 잡지는 올해 1월호에 '건국의 아버지 백범'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실었다. 이인수 박사의 눈에 이것은 한국 언론의 '비겁한 모습'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는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이 만들어 놓은 것인데, 어떻게 김구를 건국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장기간에 걸친 대륙 의존에서 독립한 국가로, 그리고 해양문명에 대한 개방사회로 만들었다는 뜻에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를 '이승만 체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요즈음 젊은 세대는 대다수가 이승만을 '독재자'의 이미지로만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이를 잘못된 교육 때문이라며 못내 안타까워했다.

"이 박사는 우리 민족이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창의력을 가지고 발전하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으나 '어떠한 독립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한 사람은 이 박사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창업자가 된 것입니다."

이승만 초대대통령 아들 이인수 박사
이승만 초대대통령 아들 이인수 박사(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건국 60주년을 맞아 흉중을 토로하고 있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아들(양자) 이인수 박사.
dohh@yna.co.kr

1945년 10월16일 귀국한 이승만은 환영식장에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흘 뒤에는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오늘까지 싸워왔다"고 말했다.

사실 대한민국의 건국사는 이승만을 빼고 나면 사실상 아무 것도 없다, 2차대전 이후의 신생국가들이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정체성 위기도 이승만을 통해 불식했다, 그러나 그를 철저하게 부정함으로써 다시 정체성의 위기를 겪어왔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에 대한 재조명, 또는 재평가 가능성이 제기됐다.

"일부 학자들이 늦게나마 그런 방향으로 새롭게 눈을 뜨고 있어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이 건국됐는지, 6.25전쟁의 전후관계와 의미는 무엇인지 등 역사적 사실에 관한 진실을 추구해 나가면 건국을 위한 이 박사의 공로는 자연히 재조명되리라고 봅니다."

그는 우리 학자들이나 언론도 이제 이승만에 대한 까닭없는 증오심을 없애고 3년 간에 걸친 건국투쟁사의 진실을 드러내야 하며, '독재자 이승만이 3.15 부정선거를 하다가 4.19로 쫓겨났다'는 식의 단순논리도 배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4.19의 내적 요인뿐만 아니라 '외적 요인'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도 폈다.

"데이비드 흄이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요 이성의 동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성은 감정의 노예다' 이랬어요. 한번 감정에 휩싸이면 모든 이성을 동원해서 그 감정을 합리화하려고 애쓰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우리 민족사에서 커다란 에포크 메이킹(epoch making)을 한 이승만 체제에 살면서 왜 우리는 반이승만을 하게 됐느냐 이겁니다."

이인수 박사는 자신의 핵심 메시지가 누락되지 않을까 걱정이라도 된다는 듯 "빨리 반이승만시대를 끝내라, 이제 우리에게는 물질문명 못지 않게 정신적인 쇄신이 필요하다, 언제까지나 김일성 사관에 매달려 쩔쩔 맬 필요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하고, 제2의 건국을 하겠다고 하고, '정의가 실패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그런 독재적인 발상은 스탈린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대명천지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사람들이 스탈린의 수법을 배워 하는 것은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이때쯤 마춤하게 이화장의 특색메뉴인 콩나물잡채와 함께 떡국 점심상이 차려져, 자리는 식탁으로 옮겨졌다. 얘기는 식사 중에도 한참 더 계속됐으나 만일을 대비해 켜놓았던 두 대의 녹음기 중 한 대는 끌 수 밖에 없었다.

◇ 이승만.이인수.이화장 = 이승만은 1960년 4월27일 하야한 지 1개월여 만인 5월29일 하와이로 떠난다.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1965년 7월19일 서거한 이승만의 유해는 7월23일 귀국해 일단 이화장에 안치됐다가 같은달 27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보성고교,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이인수가 이승만의 양자로 공식 입적된 것은 1961년 11월13일. 입적 한 달만인 그해 12월13일 하와이로 가서 이승만과 처음 상봉한다. 그 후 수시로 하와이를 오가며 부자 간의 정을 나누고 임종도 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조선 3대 임금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 전주이씨 종친회는 61년 6월 처음으로 양자 입적문제를 논의, 17대손 가운데서 영어를 할 줄 알고, 미혼인 사람을 찾은 끝에 당시 대학원생이던 이인수를 적격자로 뽑았다고 한다.

그는 이승만의 양자가 된 후 "몇몇 대학에 전임으로 들어갈 기회가 있었으나 그 때마다 이승만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좌절당했다"면서 "어떤 대학은 아버님의 은혜를 크게 입은 사람들이 총장이나 교주였음에도 정권이 바뀌니까 외면하더라"고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이승만은 4.19 이전에 당시의 이기붕 국회의장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입적했으나 이강석이 4.19 후 아버지 이기붕과 어머니 박마리아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바람에 후사가 없는 상태였다.

이화장은 현재 '우남 이승만 박사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본채와 기타 부속건물 외에 이승만이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지 사흘만인 1948년 7월20일 조각본부를 설치하고 초대 내각을 구상한 조각당(組閣堂)이 남아 있다.

이승만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후 기거할 집이 없어 돈암장, 마포장 등을 전전하며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주위의 도움으로 1947년 10월 이화장으로 옮긴 후, 대통령이 되어 경무대(현재의 청와대)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았다.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는 이승만 서거 후 일단 조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가 1970년 영주 귀국, 아들 부부의 부양을 받으며 이화장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92년 3월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8년 결혼한 이인수 박사와 부인 조혜자 여사는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don@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08/01/21 09: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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